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산업 혁명 (문단 편집) === [[기술 혁신]] === 산업화 이전의 세계에서는 무엇을 하든 물리적인 노동력, 풍력, 또는 수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에너지원들은 마음대로 필요한 장소로 보낼 수 없기에, 접근이 가능한 지역에서만 자연이 뒷받침해주는 정도까지만 생산 작업이 가능했다. 이것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제약하는 큰 구속이었다. 원양 항해 기술은 원거리 운송 비용을 파격적으로 낮추었고 그 덕분에 유럽 제국들은 먼 곳까지 진출하는 '시늉'을 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손쉽게 운항 가능한 수로를 보유한 지역들 간의 경쟁이 중요했다. 세계의 변방 지역들 즉, 지구상의 대부분의 지역들은 여전히 개발되지 않은 미개척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산업화 시대에 등장한 다음과 같은 기술들은 이런 상황을 완전히 뒤바꿀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 증기 기관과 석탄: 18세기에 결쳐 증기 기관은 주요 동력 수단으로써 노동력, 풍력 또는 수력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근대에 최초로 발명되어 성공적으로 쓰인 증기 기관은 일찍이 1698년 토머스 세이버리가 도입했는데, 이 기술을 이용하면 탄광에서 펌프로 물을 뽑아내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최초의 증기 기관은 문자 그대로, 또 발전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공히 자가 발전적인 기술이었다. 증기 펌프가 강력하고 안정적으로 작동할수록 더 많은 석탄을 생산할 수 있었고, 따라서 펌프를 가동하는 데 드는 석탄의 비용도 줄었다. 다만 증기기관의 발전은 서서히 발전한 것이 아닌 [[제임스 와트]]에 의해 갑작스럽게 발전하였다. 제임스 와트의 콘덴서(냉각기) 발명을 통해서 증기 기관은 강력해지고, 지형에 구애받지 않게 설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수레나 배 위에 설치해서 동력원으로 쓸 수 있게 변모한다. 이제 관건은 가용 석탄이 있는지 여부였다. 풍력이나 수력과는 달리 석탄은 채굴한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고체 물질이다. 게다가 기존에 노동력을 담당하던 사람과는 달리 운송되는 동안 잠을 재우거나 음식을 줄 필요가 없다. 가용 석탄이 점점 늘어나면서 동력을 생산하고 금속을 제련하고 결국 운송 수단을 발달시키는 데 석탄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어느 모로 보나 돌파구가 마련된 해는 1806년이었다. 1780년대에 일어난 파격적인 산업 기술들이 충분히 성숙하면서 철강이 대량으로 보급되었고 철도와 철강 선박을 만들 만큼 강도가 높아졌다. 증기 기관은 크기가 작아졌고 철강 선박과 철도 기관차에 동력을 공급할 만큼 강력해졌다. 증기선 덕분에 원양이든 강이든 운항 속도가 빨라졌고 계절풍의 도움이 없어도 화물 운송을 자유자재로 하게 되어서 운송의 효율성도 높아졌다. 산업 건설 기법을 강에 적용해 수문을 만듦으로써 큰 선박들이 내륙 깊숙이 위치한 지역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철도 덕분에 일정한 지점들 사이에 인공적인 수로 건설이 가능해졌다. 강이나 천혜의 항구 같은 자연의 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들도 이제 내륙/뭍의 항구가 될 수 있었다. 철도 1마일을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은 대략 다차선 도로 1마일을 까는 데 드는 비용과 맞먹었지만 철도를 운영하고 움직이는 데 드는 비용은 도로 운영과 가동에 드는 비용의 4분의 1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철도는 여전히 해상 운송 비용의 두 배에 달하기는 했지만, 강과는 달리 철도는 사람이 만들 수 있었고 따라서 철도 교통을 뒷받침할 평평한 땅이 있는 지역이라면 어디든 경제 개발을 가능케 할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 드는 시간은 몇 주와 몇 달에서 몇 시간과 며칠로 압축되었다. * 화학 물질: [[황산]](1746)과 [[탄산나트륨]](1791)을 대량 생산하는 방법이 발명되었다. 이 두 물질은 유리, 염료, 치약, 세제에서 철강, 제지, 의약품에 이르기까지 전천후로 쓰이게 된다. 탄산나트륨은 산업 혁명 초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20년대에 발명된 저렴하고 강력한 시멘트는 파격적인 변화를 가져온 또 다른 화학 물질이다. 시멘트 덕분에 수도시설, 고층 빌딩, 교각, 대대적인 교통량을 감당할 수 있는 도로 등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식량 공급량이 증가하고 새로운 건축 기법이 등장하면서 기근과 더불어 질병의 온상이던 도시들은 더 이상 이런 고통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도시의 규모는 폭발적으로 커졌고 런던은 1825년 무렵 세계 최대 도시로 부상했다. * 교체 부품(Replacable parts): 1700년까지만해도 소총이나 시계와 같은 정교한 제조 품목의 부품들은 모두 같은 전문가가 만들었다. 그러한 부품들은 고도로 숙련된 기술을 지닌 노동자가 한 번에 하나씩 정성을 다해 만들고 조립했고 수선하는 데도 그 못지 않은 정성이 필요했다. 18세기에 고도의 정밀 공법이 발달해서 상호 교체 가능한 부품들이 개발되었고 19세기 초에 선반에서부터 평삭판, 제분기에 이르기까지 공작 기계들이 발명되고 제작되면서 정밀 공법은 거의 모든 산업에 응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술 혁신 덕분에 고숙련 노동력의 수요가 감소했고, 1800년대 초 무렵에는 최초로 조립 공장이 출현했다. 완성품의 내구성이 급격히 증가했다. 숙련된 기술자의 손에 맡기지 않아도 부품만 있으면 누구든지 망가진 제품을 수선할 수 있게 되었다. 섬유에서부터 무기 제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건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 생산량, 품질, 노동자의 생산성이 모두 몇 배로 폭증했다. 기술적인 차원에서 산업 혁명은 [[철(원소)|철]]과 [[강철]]이라는 새로운 소재의 활용, [[석탄]]과 [[증기 기관]] 같은 새로운 동력원의 사용, [[방적기]]나 [[방직기]] 같은 새로운 기계의 발명, 공장제라는 새로운 노동 분업 체계의 발전, 증기 기관차나 증기선과 같은 새로운 운송 및 통신수단의 발전 등 다양한 변화를 동반하며 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산업 혁명은 과학의 급속한 발전([[과학혁명]])을 원동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과학 기술은 산업 혁명의 도화선은 아니었다. 산업 혁명 초기부터 과학 이론이 산업 기술에 직접 응용된 사례는 다소 찾아보기 힘들다. 초기 산업 혁명에 기여한 기술. 예를 들면 플라잉 셔틀, 증기기관, 뮬 방적기, [[코크스]]를 이용한 제철법, 압연법 등등은 전부 숙련된 기술공들의 작품이었다. 19세기 중후반 전기, 광학, 화학산업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기술 진보는 과학자의 이론과 연구가 아닌 숙련공 [[발명]]가들의 경험과 시행 착오의 산물이었다. 또한 산업 혁명이 일어난 영국은 교육이나 과학에 있어 프랑스보다 다소 뒤쳐졌다. 프랑스는 파리 대학을 대표로 중세부터 이어진 학문의 전통이 존재했고, 프랑스 혁명 시대에도 나폴레옹이 파리 이공과 대학을 설립하고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등 체계적인 학문의 발전과 절차가 있었으나, 잉글랜드의 대학이라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둘 뿐이었는데 둘 다 당시 유럽에서는 쳐주지도 않는 대학이어서, 좀 공부한다 하는 잉글랜드인들은 오히려 스코틀랜드로 가서 교육을 받았다. 일례로 증기기관을 설명하는 열역학이 프랑스인 카르노에 의해 시작됐다는 점, 근대 경제학의 시작인 [[애덤 스미스]]가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것이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근대 과학의 의의는 산업 혁명의 기술혁신 과정에서 나타난 발명품과 공학 기술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완성시킨 것에 있다. 그리고 산혁 과정에서 더 다양한 기계와 제품, 더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 기술은 학자들의 논문을 벗어나 산업・민간 분야에 널리 상용화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